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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객들이 폭행당하는데도 차 버리고 도망칠 수밖에 없었어요"

민경환
2022.03.29 17:45 4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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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는 게 이런 건가 싶다...


http://news.v.daum.net/v/20220312100004916


"승객들이 폭행당하는데도 차 버리고 도망칠 수밖에 없었어요"

박준배 기자,이수민 기자 입력 2022. 03. 12. 10:00


[5·18 정신적 손해배상⑯] 대창운수 3번 버스 기사 윤동현씨
5월20일 차량시위에 합류해 계엄군에 폭행 당해.."평생 죄책감"

[편집자주]'80년 5월'은 현재 진행형이다. 40여년이 흘렀으나 피해자들은 그날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원인 모를 질병과 트라우마, 우울증 등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정신병원에 입원하거나 자살한 피해자들도 많다. 최근 이들에 대한 정신적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뉴스1광주전남본부는 5·18 피해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정신적 손해 배상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점검한다.

11일 오후 광주 서구 농성동의 한 가정집에서 만난 5·18 피해자 윤동현씨(78)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 윤씨는 80년 5월20일 차량 시위대의 선두에서 3번 버스를 몰았던 버스 기사다. 2022.03.12/뉴스1

(광주=뉴스1) 박준배 기자,이수민 기자 = "승객들이 군인들에게 폭행당하는 모습을 보고도 차를 버리고 도망칠 수밖에 없었어요. 내가 살아야 했기 때문에…."

70대 노인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평생을 죄책감에 살았다. 좋아하던 버스 운전 일도 그만둬야 했다. 40여 년이 지난 아직도 그때만 생각하면 부끄러움과 창피함이 밀려든다고 했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의 상징적 장면 중 하나는 차량 시위다. 5월20일 11대의 시내버스와 200여 대의 택시가 무등경기장에서 옛 전남도청을 향해 진격했다.

선두에 선 4대의 시내버스 중 맨 왼쪽 '3번 버스' 운전기사가 윤동현씨(78)다. 11일 오후 광주 서구 농성동의 한 단독주택 2층 셋방에서 윤씨를 만났다.

80년 5월 당시 윤씨는 서른여섯 살이었다. 동구 계림동에서 아내와 네살 다섯살 남매 등 네 식구가 함께 살았다.

서른살 넘어 시작한 버스 운전은 꽤 적성에 맞았다. 대창운수 소속으로 북구 각화동과 남구 광주대학교 앞을 오가는 3번 버스를 운전했다.

윤씨의 휴대폰에 저장된 80년 5월20일 차량 시위 사진. 윤씨는 "맨 왼쪽에 있는 버스가 내가 몰았던 버스"라며 "지금도 5·18 동지들이 당시 버스 사진을 보면 촬영해 보내준다. 이를 저장해놓고 가끔씩 그때를 떠올린다"고 설명했다. 2022.03.12/뉴스1

"시내버스를 운전하다 보니 광주 상황은 자연스레 알게 되죠. 전두환이가 누군지는 몰라도, 대학생들이 다 전두환을 욕하는 건 알았어요. 하도 이름을 들먹이고 동네마다 군인들이 보이니까 눈치로 알았죠."

군인들이 광주 시내를 점령하고 시민들을 폭행한다는 소식을 듣고 있었다. 하지만 시위에 참여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한 가족의 가장이고 돈을 벌어야 하니까요. 나랏일보다 내 일이 더 중요했죠."

5월20일, 여느 때처럼 버스를 운행했다. 오후 5시30분쯤 북구 중흥동 광주역 부근부터 차가 막히기 시작했다.

동구 대인동 시외버스공용터미널(현 롯데백화점)을 지날 때쯤 윤씨는 길이 막히는 이유를 알았다. 얼마 전 동료에게서 '차량 시위' 얘길 들은 터였다. 택시와 버스, 화물차 운전자들이 전부 모여 북구 임동 무등경기장부터 전남도청까지 차량 시위를 벌인다고 했다.

금남로5가 교차로를 지날 때였다. 윤씨가 운전하는 3번 버스 노선은 남구 월산동·백운동 방면으로 직진해야 했지만, 시위 군중이 길을 막아 직진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좌회전했다. 금남로 전남도청 방향이었다.

"사람을 치고 노선대로 갈 수는 없잖아요. 하는 수 없이 좌회전했는데 엉겁결에 도청으로 가는 시위대에 합류하게 된 거죠. 짜증보다는 겁이 났고, 당혹스러웠어요."

차량 시위대 옆에서 도로를 걸으며 "전두환은 물러가라" "독재 타도" 등 구호를 외치던 학생들이 버스 문을 두드리며 태워달라고 했다.

문을 열어주니 "감사하다"며 열댓 명이 우르르 버스에 탔다. 학생들은 버스 창문을 열고 구호를 외쳤다.

금남로 도로는 200여 대의 차량과 수만 명의 시민들로 꽉 찼다. 택시가 선두에 서고 버스, 화물차 등이 뒤따랐다.

학생들이 윤씨에게 시내버스가 시위 행렬 맨 앞으로 가달라고 했다. 윤씨는 '차라리 맨 앞으로 가서 학생들을 내려주고 노선대로 빠지자'는 생각으로 차를 선두로 몰았다. 다른 시내버스도 선두로 나섰다.

도청 앞 카톨릭센터(현 5·18민주화운동기록관) 건물을 지날 때였다. 센터 건물 안에 숨어있던 공수부대원 수백 명이 곤봉을 들고 거리로 달려 나왔다.

"센터에 주둔하고 있던 놈들이 갑자기 튀어나와 시민이고 차고 막 두들겨 팼죠. 가다가 잡히면 맞고 쓰러지고, 이빨이 깨지고 피투성이가 되고…. 어휴, 다시 생각해도 끔찍해요."

차량이 많은 데다 앞에는 시민들이 폭행을 당하고 있으니 윤씨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버스를 멈춰세웠다.

그때 한 군인이 윤씨의 버스 앞 유리를 향해 곤봉을 던졌다. 앞 유리가 '퍽' 소리와 함께 와장창 깨졌다. 유리 파편이 윤씨의 몸 위로 쏟아졌다.

공수부대원들이 "시동 꺼, 이 XX야. 문 열어!"라며 버스를 곤봉으로 쳤다. 윤씨가 문을 열자 군인들이 우르르 버스에 올라타 승객과 학생들을 마구 두들겨 팼다. 창문에 잔뜩 피가 튀었다.

깜짝 놀라 이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윤씨에게도 곤봉이 날아들었다. 군인은 버스 안내원과 윤씨의 머리를 번갈아 가며 수차례 때렸다.

"그땐 '내가 여기서 죽는구나' 싶었어요. 그때 열려있는 버스 문이 보이더라고요. '살아야겠다' '무조건 내려야겠다'해서 순간적으로 군인을 확 밀치고 도망쳐 나왔죠. 버스도 버리고 승객도 버리고."

11일 윤동현씨가 자신의 차량 앞 유리로 곤봉을 던졌던 계엄군의 모습을 재연하고 있다. 2022.03.12/뉴스1

버스에서 내린 뒤로는 앞만 보고 달렸다. 뒤에서 군인들이 "저 XX 잡아"하며 쫓아오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는 돌아보지도 않고 뛰었다. 윤씨는 "살면서 그렇게 달려본 것은 처음이었다"고 말했다.

윤씨는 함께 도망친 학생·운전기사 등과 옛 동구청 사이 골목에 있는 여인숙 촌으로 숨었다. 대문이 열려있는 한 여관으로 신발조차 벗지 않고 우르르 들어갔다.

40대로 보이는 주인아저씨가 "군인 새끼들, 죽일 놈들, 아주 나쁜 놈들"이라며 윤씨를 비롯한 10여 명을 가장 안쪽의 빈방에 숨겨줬다.

주인아저씨가 장롱 안에서 구급상자를 꺼내 한 명씩 치료했다. 거울을 보니 윤씨도 피투성이였다. 머리카락에 붙은 유리 파편을 털어냈다. 머리도 곤봉에 맞아 찢어져 있었다. 주인아저씨가 붕대를 잔뜩 감아줬다.

치료가 끝나고 기진맥진한 몸을 벽에 기댔다. 일행들은 서로 통성명을 했다. 윤씨와 같은 버스회사에서 같은 3번 버스를 모는 동료 운전기사 임한옥씨를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대학생들이었다.

"갓 죽다 살아나 정신도 없었고 밖에 나간다고 하면 다시 죽을 것 같았죠. 전부 뜬눈으로 밤을 새웠어요."

밤 11시쯤 멀리서 '펑, 펑'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 무언가 불에 타는 냄새도 솔솔 올라왔다. 한 대학생은 "진짜 전쟁 난 거 아닌가요"라며 불안해했다.

여관 옥상으로 올라가 보니 멀리서 화염이 하늘로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동료 임한옥씨가 불타는 위치를 보더니 방송국 건물인 것 같다고 했다.

"계엄군의 과잉진압을 보도하지 않는 언론에 분노한 시민들이 광주MBC 방송국 건물에 불을 지른 거죠. '펑' '펑' 터지는 소리는 방송 장비가 타는 소리 같았어요."

그때 '두두두두' 기관총 소리가 났다. 겁에 질린 일행들은 다시 방안으로 숨었다. 저공비행하는 헬기 소리와 '다다닥' 총소리가 반복해서 났다.

21일 오전 4시쯤, 동이 틀락말락 하던 이른 새벽 윤씨를 비롯한 일행은 전부 여관에서 빠져나왔다. 큰 길가에는 군인들이 시커멓게 탄 시체를 트럭에 싣고 있었다. 시체를 실은 트럭은 북구 각화동과 망월동 방면으로 이동했다.

버스 운전 일을 하며 지리를 잘 알던 윤씨는 골목을 통해 계림동에 있는 집으로 향했다. 함께 있던 학생들에게도 "어디 사냐"고 물은 뒤 골목으로 집에 갈 수 있는 경로를 가르쳐줬다.

집에 도착하자 눈이 퉁퉁 부은 아내가 문 앞에서 윤씨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내는 윤씨가 죽은 줄로만 알았다고 했다.

그날 이후 몸에 남은 고통과 정신적 트라우마가 윤씨를 괴롭혔다. 머리를 다쳐서인지 기억력이 심하게 감퇴했고 분노 조절이 안 되거나 세상과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커졌다.

"저는 직업이 버스 기사인데 버스 몰다가 그 일을 당한 거예요. 일을 할 수가 있었겠어요? 게다가 당시엔 5·18에 참여했으면 삼청교육대에 끌고 가 죽인다는 소문이 있었어요. 치료고 뭐고, 아무한테도 말할 수 없었죠."

먹고 살아야 하니 다시 버스 운전대를 잡았지만 금남로를 지나갈 때면 눈앞이 아찔했다. 대부분의 노선이 전남도청 앞을 지나기 때문에 제대로 일을 할 수 없었다.

승객과 버스를 버리고 도망쳤다는 죄책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트라우마 때문에 일을 그만뒀다가 돈이 없으면 다시 다니고, 또 그만뒀다가 다시 다니는 일이 반복됐다. 처음엔 편의를 봐주던 회사에서도 어느 순간 윤씨에게 눈치를 주기 시작했다. 윤씨는 일을 그만두고 집 안에만 틀어박혀 지냈다.

몸이 안 좋아지면서 당뇨 판정도 받았다. 정신과 약과 당뇨약을 함께 먹으니 늘 속이 쓰렸다. 몇 년간 앓아 온 당뇨 증세는 점점 심해졌고 어느 순간부터 다리까지 절었다.

그런 윤씨를 곁에서 지켜준 사람은 아내였다. 그는 아내를 '착한 사람'이라고 떠올렸다. 트라우마 때문에 돈벌이도 하지 못하는 무능력한 자신을 평생 곁에서 지켜줬다고 했다.

취재진에게 아내 얘기를 하던 윤씨가 갑자기 '악' 소리를 질렀다. 자신의 가슴을 주먹으로 여러 차례 내리치더니 오열하기 시작했다. 한동안 울부짖던 윤씨는 이윽고 아픈 속내를 털어놨다.

"아내를, 우리 집사람을 손찌검했어요. 애들한테도 난폭하게 굴었어요. 그때 후유증으로, 나도 모르게 성격이 변해버린 거예요. 지금 생각하면 후회스럽고, 내가 왜 그랬나…. 죽고 싶어요."

매일 술과 약에 취해 지내다 보니 모든 사람이 '군인'처럼 보였다고 했다. 방어하려고 주먹을 휘둘렀는데 정신을 차려보면 아내와 아이들이었다. 윤씨는 "그때 눈에 무언가가 씌였던 것 같다"고 했다.

윤씨의 아내는 1994년 우울증을 겪다가 간 경화 판정을 받고 사망했다.

윤씨는 1990년 국가에 피해 보상 신청을 했지만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반려됐다. 2000년 10월 언론에 공개된 사진과 영상 등에 윤씨가 몰던 버스가 찍혔고 행정소송 끝에 800만원의 보상금을 받았다.

"부족하지만 뭐 어쩌겠어요. 다 제 탓이죠, 뭐. 트라우마 센터 수업 듣는 게 삶의 유일한 낙이에요. 가서 사진도 배우고, 꽃꽂이도 하고. 5·18에 대해 치유를 하는 거죠."

윤씨는 2018년부터 5·18 피해자를 위한 트라우마 센터에 다니고 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주기적으로 센터에 가면 그나마 '그 순간 만은 버틸 수 있다'고 했다.

"예전에는 과목 수도 다양하고 가는 날도 더 잦았는데 요즘에는 코로나19로 집에 혼자 있는 날이 부쩍 늘었어요. 이러니까 더 우울하고 죽고 싶죠. 정신적 피해 보상금을 받으면 사설 치료센터를 다니고 싶어요. 제발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요."

윤씨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방바닥으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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